[기획] 용인독립운동가 ‘유근’을 재 조명한다

당대 최고 문장가이자 학자, 언론을 통한 구국운동 전개

경기인 | 기사입력 2014/03/04 [17:02]

[기획] 용인독립운동가 ‘유근’을 재 조명한다

당대 최고 문장가이자 학자, 언론을 통한 구국운동 전개

경기인 | 입력 : 2014/03/04 [17:02]

황성신문 주필,논설위원,5대사장, 동아일보 창간 산파
1905년 11월 20일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과 함께 마무리
조선광문회,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 등 전방위 애국계몽운동
처인구 김량장동 용인중앙공원 내 묘소에 잠들다
 
▲   유근 선생   © 경기인

【경기IN=김정제 기자】일본정부의 독단적인 독도 영유권 주장과 다케시마의 날 행사 개최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민족의 냉철한 역사관과 현실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용인시는 오는 21일 원삼좌전고개 용인만세운동 기념탑에서 용인3.1만세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당시 13,200여명의 주민이 참여해 경기도 내 두 번째 규모였던 용인만세운동의 발원지에서 일제 식민지배에 태극기를 들고 온몸으로 저항한 선열의 뜻을 새길 계획이다.

용인은 충절의 정신이 면면히 내려온 고장이다. 구한말 혼란이후 한일병합(1910.8.29)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35년간 일제의 압제를 이겨내 광복(1945.8.15)을 되찾기까지 용인 항일투사들의 강한 정신은 스러질 줄 몰랐다.

그 가운데 석농 유근 선생((1861.9.26-1921.5.20)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한국 근대언론의 선구자이다. 선생은 자주정신과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이 자립자강의 길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에 헌신했다.

아울러 교육, 종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자취를 조명한다.


▲  유근 선생 묘소   © 경기인

■ 처인에서 태어나 용인중앙공원에 잠들다

유근선생은 양지군 주서면(현 처인구 마평동)에서 1861년 9월 26일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석농(石?)은 호이다.

향리에서 한학공부를 했으며 1894년 갑오년에 상경, 이듬해 4월 온건 개화파 김홍집 내각에 참여, 탁지부 주사로 일한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선생은 그 해 4월 주사 자리를 물러나왔다.

이후 우리 민족은 계몽 선각자의 사표 한분을 얻게 된다. 선생은 언론, 교육계몽 운동, 민족종교 운동, 고전 편찬을 통한 출판구국운동 등 전방위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일제 치하 잦은 감옥생활과 오랜 숙환으로 1921년 5월 20일 61세의 일기를 마쳤다. 그해 6월말까지 국내 사회와 언론계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이어졌다.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선생의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용인중앙공원 내 현충탑 동편 담장 아래 위치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증했다. 국가보훈처는 2001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그를 선정했다.

선생의 활동을 언론활동(황성신문시대, 동아일보 산파), 출판구국운동, 교육, 대종교 활동 등으로 구분해본다.


▲  유근 선생 글   © 경기인

■ 황성신문 시대 - 신문은 쓰러져가는 ‘나라의 버팀목’

선생은 대한제국기 12년간 언론활동을 전개한다. 다른 어느 언론선각자들에 비해 가장 오랜 기간이며 쉼 없고 굽힘 없는 저항의 세월이었다.

선생은 1898년 4월 박은식, 장지연 등과 황성신문 창간에 산파역을 했으며, 주필과 논설위원으로 활약했고, 5대 사장으로 1907년 9월부터 3년 가까이 황성신문 후반기를 이끌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강제체결 전말에 분개하여 이를 규탄한 황성신문의 명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격분한 장지연이 끝을 맺지 못하고 쓰러지자 유근 선생이 그 후반부를 끝내고 밤새 인쇄하여 당국의 검열도 받지 않은 채 배달한다. 신문은 무기정간 당했다.


▲ 처인구 통일공원    © 경기인

■ 출판구국운동 - <조선광문회> 고전편찬사업 헌신

선생은 대표적인 구국운동단체에는 거의 모두 참여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 참여한 애국계몽운동은 조선광문회의 고전편찬사업과 대종교에 참여한 일이다.

선생이 참여한 조선광문회의 작업은 일제의 잔악한 문화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연구를 지속시킬 수 있는 소중한 토양이 됐다.

조선광문회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최남선이 1910년 8월 29일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지식인 사회에 재인식케 하기 위해 조직한 일종의 출판구국운동이다.

광문회 설립 당시 “조선의 진면목과 조선인의 진실한 재주가 영원히 매몰당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광문회를 설립한다”고 그 취지를 밝히고 있다.

조선의 옛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것을 수집,편찬,발간하여 귀중한 문서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했으며, 동국통감,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등의 역사류와 택리지, 훈몽자해, 용비어천가, 산림경제, 열하일기 등 모두 22권의 책을 간행했다.

선생은 최초의 한문자전인 ‘신자전(新字典)’ 발간에도 앞장 섰다. 신자전은 1915년 12월 5일 발행된 근대적 출판형태를 갖춘 한자사전이다.

광문회 출범시 시작되어 5년이 걸린 방대한 작업을 유근선생이 주관했다. 선생을 비롯한 신자전 편집동인들은 국어사전 편찬준비도 했으며, 이 작업은 훗날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편찬의 모태가 된다.

그밖에도 선생은 역사서를 편찬, 민족의식 고취에 활용했다. 신정동국역사(1906), 초등본국역사(1908), 신찬초등역사(1910) 등을 발간했다.


▲통일공원 독립항쟁 기념탑     © 경기인

■ 구국 민족종교운동 ‘대종교’에 헌신하다

선생은 단군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를 ‘조선의 정신적 식량’으로 간주하고 언론을 통한 단군정신의 고양에 적극 앞장섰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중심으로 강력한 종교운동을 통해 민족의 각성과 단결을 도모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이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 나철이 창시한 민족종교로 유근 선생을 위시한 박은식, 이기 등 애국계몽 운동인사들이 참여했다.

유근선생과 조선광문회 활동을 함께 한 김교헌은 나철에 이어 대종교 2대 도사교(都司敎,교주)에 올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고 만주의 무장항일운동을 적극 주도했다.

한국독립전사상 최대 대첩인 1920년 청산리 대승전으로 유명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김교헌의 대종교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조직이었다.

유근 선생은 서울 남도본사에서 간부진과 함께 국내 대종교를 이끌었다. 일제치하 내내 일본의 노골적인 탄압에 시달린 종교단체를 보호하며, 만주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에 전국13도 대표가 모여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석했고, ‘한성정부’의 정부체제 선택과 각료 선정에 참가하다가 일제에 검거됐다.


▲ 수지 만세운동 기념탑    © 경기인

■ 근.현대신문 여명기, 동아일보 창간 산파 역할하다

선생은 휘문의숙 숙장, 중앙학교 교장(1915년 4월~1917년)까지 재임한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자 금기의 대상이던 민간신문의 창간운동이 일어난다.

현대신문 여명기를 맞아 민족진영의 젊은이들이 주동이 된 신문이 창간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중앙학교를 경영하던 김성수는 교육사업에 전념하려 했으며 주변의 신문창간 권고를 고사했다. 이때 유근 선생은 민간신문 발행이 시급한 과제라며 적극 권유한다.

선생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컸던 김성수는 선생의 의견에 동의하고 1919년 10월 9일자로 총독부 경무국에 신문발행신청서를 제출한다. 이때 신문의 제호를 동아일보(東亞日報)라 명명한 분도 선생이었다.

조선민족이 독립을 쟁취하려면 조선민중의 시야를 넓혀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보지 않고 동아시아 일원으로 보고 동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삼아야한다는 의미였다.

동아일보 창간호에도 ‘동아’란 말이 광의로는 중국, 일본 등을 모두 지칭하는 동아시아, 협의로는 ‘동’은 만주와 몽고 한반도 등 옛 조선의 강역을 가리키는 말로 ‘동아’는 조선으로 통하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선생은 60세의 노령으로 동아일보의 편집감독으로 취임했다.

대한민국은 G20 선진국 대열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이때야 말로 줄기차게 일제 침략에 저항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자립자강운동의 선봉에 섰던 민족의 사표, 유근 선생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시기일 것이다.

평화와 협력의 새 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용인 독립운동가 유근 선생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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